이런저런 이야기

세월호 사고의 구조, 수습 과정을 보며

Young1Kim 2014. 4. 21. 08:26

이번 세월호 사고의 구조, 수습과정을 보며 8년전 우리 방계회사의 비행기 사고에 가족돕기 팀으로 출동했던 기억을 되살려본다.

2006년 8월 27일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TV를 키니 캄에어 제트기 한대가 렉싱턴 공항에서 이륙을 시도하다가 떨어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때 나는 델타 항공사의 방계회사인 델타 테크놀로지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는데 캄에어도 델타의 방계회사였다. 나는 그전해에 델타항공사나 방계회사 또는 제휴사의 비행기가 사고가 나면 피해자와 가족을 돕는 케어 팀의 멤버로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급히 간단한 여행 백을 준비하는 중에  본사에서 전화가 왔다. 그로부터 한시간후 지시 받은 장소에 도착하니 먼저 온 멤버들이 특별기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해서 정오가 되기 전에 렉싱턴 (켄터기주) 현장에 도착했다.

 

델타는 케어 팀을 그보다 십년쯤 전에 구성했는데 그간 다행히 본사 비행기는 사고가 난 적이 없었으나 1998년에 제휴사였던 스위스 에어 비행기가 카나다 동북부 바다에 추락한 적이 있었다. 그때 멀리있는 스위스 사람들을 대신해 델타 케어 팀이 출동했었다. 내가 렉싱턴에 도착했을 때는 8년전 스위스 에어 사고때 경험을 쌓은 멤버들이 이미 시내에 있는 켐벨 하우스 호텔에 본부를 설치하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있었다. 그리고 적십자사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가족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적십자사와 협조해 가족들의 모든 필요에 응할 수 있었다.

 

나는 본부에서 받은 전화로 한 부인에게 전화했다. 델타 항공사의 가족돕기 요원 아무개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항공편이나 지상교통편, 호텔 예약등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주선해 해결해 드리겠다고 내 역할을 설명했다. 미망인은 여러번 대화를 중단하고 흐느꼈다. 첫날 그렇게 몇 가족에게 전화를 하고는 녹초가 됐다. 비극을 당한 가족과의 첫 전화는 그리 쉽지 않았다.

 

대부분 사고 원인 조사가 이뤄지고 시신이 수습된 다음에 오겠다고 했으나 한 가족은 즉시 렉싱턴으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아틀란타 본사의 케어팀 요원에게 전화해 교통편과 호텔등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고 잠시후 모든것이 준비 됐다는 통보를 받고 가족에게 연락했다. 이렇게 케어팀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한 부분은 현지에서 가족을 돕고 다른 한 부분은 본사에서 항공편, 호텔등의 문제를 해결했다.

 

현지에 도착한 가족과의 접촉은 주로 교통안전국 (NTSB)의 브리핑을 전후해서 이루어졌다. 사고의 조사는 모두 NTSB가 주관했다. 회사 대표는 단상에 올라오지도 않았고 사과인사를 한다던지 하는 일도 없었다. 50명 피해자의 가족들과 같은 방에서 브리핑을 듣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한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할 때 한가족의 오열을 지켜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 50배의 오열을 지켜보며 감정에 극복되지 않으려면 초인간적 힘이 필요했다.

 

탑승자들이 어느 시점에서 사망했습니까? 저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비행기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시신들이 기체 내에 있습니까 밖에 흩어졌습니까? 첫 브리핑의 질문들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졸지에 잃은 유가족의 입장에서 회사와 당국을 비난하고 욕을하고 고함을 질러도 다 이해를 할 판인데 감정이 격해 언성이 다소 높아지는 것도 한두사람에 불과하고 대개는 사실을 더 잘 알려고 조용히 이성적 질문을 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이 나는 것이 더욱 분위기를 숙연히 할 뿐이었다.

 

두번째 날의 브리핑에는 지방정부 검시관의 보고가 있었다. 자기 직원의 누이가 탑승객이어서 자기도 이 사고에 개인적으로 연관 되었음을 설명했다. 자신도 장의사인 입장에서 장례시 관을 열지 못할 것으로 안다고하자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우리는 훈련 받은 대로 어려움에 처한 유가족에게 물리적 편의만을 성심껏 베풀었다. 호텔 로비에서 밤새 대기하다가 맥주와 안주를 요구하는 전화가 오면 즉시 갖다줬다. 정서적, 심리적 조언은 삼갔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않고는 가족에게 달렸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또 이후에 가족과 연락을 하는것도 금지됐다. 현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올때 본부에서 받은 전화를 반납하며 가족과의 인연은 끝났다. 2년후에 회사를 떠날 때 까지 다행히 사고가 더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