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이라는 두 글자는 우리에게 안 가본 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가봤던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한다. 은퇴를 갓 했거나 곧 하려는 우리 또래의 부머들은 은퇴를 하고 무엇을 하려냐고 물으면 거의 모두가 일단 여행을 하겠다고 한다. 특히 자영업을 하던 이들은 휴일도 없이 일하던 바쁜 일정에서 드디어 풀려나 가보지 못한데를 가보고 싶어한다. 또 은퇴 초기 아직 기력이 있어 여행이 힘들지 않을 때 많이 다녀 봐야지 하는 촉박감도 있다.
은퇴를 했건 안 했건 간에 일상생활은 단조롭고 하루 하루가 지나며 성취감을 느끼기 힘든다. 그에 비해 여행할 때는 분명한 목적이 생긴다. 다음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는 게 그날 그날의 목적이다. 그리고 결국 집에 돌아와야 하니 단조로운 일상 생활에 비해 확실한 시작과 끝이 있고 끝난 후에는 무사히 다녀왔다는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기왕 돈 쓰고 시간 써 여행 하는 것 어떻게 하는게 더욱 보람 있게 하는 것일까.
유럽 여행 전문가 릭 스티브스는 여행을 할 때 관광객 같이 하지 말고 temporary local 임시 주민이 되라고 한다. 임시 주민이 되라는 건 거기 사람들 살 듯 지내다 오라는 것이다. 거기 사람들 먹는 걸 먹고 거기 사람들 타는 걸 타고. 그러면 당연히 돈도 절약하게 되고 거기 사람들과 교제도 나눌 수 있다.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것은 주민에 가까워진 건데 버스를 탈 수 있으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거다. 영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선 영어로 간판이 나붙고 영어 메뉴를 주는 식당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미국식 음식을 흉내 낸 관광객 상대 식당이어서 음식 맛은 없고 값은 비싸다. 어느 나라고 한국과 같이 시장 거리에 주민들이 애용하는 식당이 많다. 시장 거리에 있으니 신선한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싸고 맛있다. 메뉴를 읽을 수 없으면 다른 손님 상을 둘러보고 그럴 사 하게 보이는 음식을 가르키며 저거 하나 달라면 된다.
전철과 버스로 그 도시에서 가고 싶은 곳을 다 가고 보고싶은 것을 다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으면 임시 주민이 되는 첫 단계를 통과 한거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어서 궁전, 교회, 박물관 등 전에 보지 못했던 것 걸 보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런 걸 만든 사람들의 후손인 그곳 주민들이 우리와 다르게 생기고 모르는 말로 소통을 할 지언정 근본적으로는 사고방식이 같은 인간인 것이 더 신기하다. 즉 가짜 주민으로서 진짜 주민을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생기는 거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피사로 가는 기차 안 에서였다. 이탈리아 에서는 기차표를 산 후 타기 전에 기계에 표를 넣고 시간을 찍어야 한다. 시간이 찍히지 않은 기차표를 가지고 승차를 하면 무임승차로 벌금을 물게 된다. 그런데 그 피사 행 열차에 한 외국인 승객이 시간을 찍지 않았다. 검표원이 시간을 찍었어야 한다고 하니 승객은 시간을 찍어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고한다. 그 이탈리아 검표원은 “Nobody told you?” 하며 답답한 듯 무릎을 치다가 그냥 지나간다. 영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절대로 용서가 없고 꼼짝 없이 벌금을 물어야 하는데 이탈리아가 반도나라라서 같은 반도나라 사람인 우리와 인간성이 비슷하다고 하더니 정말 말만 잘하면 통하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베네치아에는 바포레또 라고 불리우는 배가 시내 버스이다. 호텔 앞의 작은 운하에 있는 정거장에는 매표소가 없어서 기차역 앞에 있는 매표소에서 3일 표를 사면서 다음 날 아침부터 3일을 타고 3일 후 아침에 공항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고 시간을 찍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어젯밤 시간이 찍혀 있다. 매표원이 표를 발행한 후 습관적으로 시간을 찍은 모양이다. 기차역 앞의 정거장에 다시 가서 검표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는 매표소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표를 다시 발행해 줄 수는 없고 그 표로 3일후 아침에 그냥 타라고한다. 그랬다가 무임승차로 잡히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지금 자기에게 말한대로 자초지종을 말하면 괜찮을 꺼라고 한다. 공무원이 자기나라 법을 어기라고 외국인에게 권하는 나라가 유럽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러나 한국에선 지금은 몰라도 예전엔 말만 잘하면 통했었다. 반도나라 국민 만세!
내가 가본 나라 중 제일 위험한 나라가 베네주엘라였다. 집사람과 수도 카라카스에서 해변에 구경을 나갔다가 다시 카라카스 호텔로 돌아오는데 일단 도시에 들어와 번화한 광장이 앞에 보이자 버스에서 내렸다. 광장에 불도 환하게 켜졌고 인파가 몰려 다녔다. 한 약국에 들어가 약사 아줌마에게 플라사 베네주엘라 엘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물었더니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르킨다. 밖에서 어물쩡 하다가는 머리에 총맞아 죽는다는 뜻이다. 20불을 뺐으려고 사람을 죽인단다. 다행히 집사람은 그걸 못 봤다. 봤으면 기절을 했을 텐데. 그리고는 거기 가는 버스가 광장 저편에 올 텐데 오면 자기가 가르쳐 줄 테니 빨리 뛰어가서 타라고 한다. 그래서 버스가 왔을 때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달려가 탔다.
다음 날에는 산 안토니오 라는 작고 예쁜 도시에 갔다. 남미의 작은 도시들은 한 가운데 광장이 있고 광장 한쪽엔 성당이 있고 광장을 둘러싸고 가게와 식당이 있다. 미국 교회는 예배 시간에만 열리는데 남미 성당은 문이 항상 열려 있고 예배시간엔 닫힌다. 성당에 들어가 보고 가게도 기웃거리고 점심도 먹은 후에 버스 종점에서 카라카스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렸더니 곧 한 대가 왔는데 운전기사가 내리며 점심을 먹고 올 테니 버스에 타고 기다리란다. 그래서 올라탔는데 운전석 옆에 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운전기사의 나이로 봐서 수십년간 버스 운전을 한듯한데 한번도 버스에서 돈을 도둑 맞은 일이 없었나 보다. 그러니 그렇게 쌓아 두고 밥을 먹으러 가지. 같은 나라에 돈 20불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나절 받은 돈을 버스에 놔두고 문을 열어 둔 채로 밥 먹으러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가 거기 있을 때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으로 선출 됐는데 그후 20여년간 그 나라는 더욱 위험하고 못사는 나라로 전락했다. 재미로 여행을 하는 데 목숨 까지 걸 필요는 없다. 거긴 다시 가지 않았다.
코스타 리카는 중남미에서 비교적 안전한 나라여서 가끔 갔다. 산 호세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찻길을 몇 번 건너 께뽀스로 가는 급행 버스를 타는 법을 공항 직원들에게서 배웠다. 한번은 옆에 탄 사람이 버스가 지나가며 새로운 풍경이 나올 때 마다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물론 스페인어로 했지만 손짓 발짓 얼굴 표정으로 얼추 의사 소통이 됐다. “저기 야자열매 밭이 보이지? 그 열매로 기름을 짠다. 조금 있으면 기름 짜는 공장이 보인다. 저기 보이지? 이 냄새가 그 기름 냄새야.” 조금 후에 널판지 조각을 얼기설기 얹어 놓은 위태한 다리를 건널 때는 “여기서 버스가 떨어져 강에 빠지면 큰일이야. 강에 악어가 있어.” 하며 두 팔을 열었다 닫었다 하며 악어의 큰 입이 열리고 닫히는 시늉을 한다. 그 사람에게 께뽀스에 냉방 되고 깨끗하고 싼 호텔을 아냐고 물었더니 삼촌이 하는 호텔이 있단다. 버스가 께뽀스에 도착하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니 곧 자전거를 타고 와 안내했다. 2층의 방은 정말 냉방이 되고 깨끗하고 전망도 좋았다. 삼촌에게 얼마냐고 물었더니 13불이라고 한다. 예상치 못한 금액이라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31불이라고 했냐고 되물었더니 아니라며 종이에 13을 써준다.
내가 가 본 모든 나라에서 이렇게 그 나라의 주민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지만 근본적으론 정이 있는 같은 인간인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점이 그 나라 특유의 교회와 궁전의 건축 양식 보다 더 관심이 갔고 주민들에게 정이 갔다. 사실 피사의 사탑과 피렌체의 우피치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보다 피사 행 기차와 바포레토의 검표원 들이 더욱 인상 깊었고 카라카스의 박물관과 산 안토니오의 성당 보다 약국 아줌마와 버스 운전기사가 더 정답게 기억에 남는다. 코스타 리카의 해변과 열대림과 희귀한 다람쥐 원숭이 보다 야자 열매로 기름을 짠다는 걸 가르쳐주고 13불 짜리 최고급 호텔에 안내해준 께뽀스 동료 주민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인간적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면 임시 주민이 되는 두번째 단계가 성취 된 거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지금의 위기가 속히 해결돼 다시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고대한다. 모든 위기는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다. 이 위기에도 끝이 있을꺼고 그러면 다시 임시 주민이 되어 행선지 나라의 주민들을 더 많이 만나고 그들 또한 먼저 만났던 주민 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같은 인간인 걸 확인하고 싶다. 그러다가 이 세상을 떠나서 다음 세상에 가서는 임시 주민에서 진짜 주민으로 승급 하는 영광을 누리고 신입 주민인 나도 그곳에 먼저 있던 주민들과 같이 축복 받은 인간 인걸 확인하는 세번째이며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