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시절 이야기

제대 말년에 형편 반짝 피다

Young1Kim 2020. 10. 27. 07:12

일반영어교관실장 양대위가 전역을 하며 대전 시내에 영어학원을 차렸다. 기술영어 교관이던 김상사도 전역을 하고 양대위의 학원에 강사로 갔다. 어느날 양대위가 교관실로 전화를 해 김상사가 자기 학원을 차려 나갔는데 그의 반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김상사의 반에 가보니 여닐곱명의 학생이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새 선생을 쳐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한달이 지나곤 거의 반이 학원을 떠나버렸다. 나도 양원장에게 면목이 없어 그만 뒀다.


얼마후 양원장이 새 반을 만들어줄테니 다시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두반을 구성해 운영하면 한달 후에는 학생 수가 반으로 주는데 그 두반을 합쳐 한반으로 운영하면 그반은 꾸준히 계속 된다고 두반을 맡아보라고했다. 나는 두반은 도저히 못하겠어서 한반만 맡기로 하고 다시 나갔다. 양원장이 "교육대대에 들어오는 학생은 김중위의 교육방법이 좋던 싫던 교육기간을 마칠 때 까지 있어야하고 결국은 많이 배우고 나가게 되는데 학원에서는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학생이 아무 때나 떠나버리니 많이 가르치려고 하지말고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도록만 가르쳐라"고 조언을 해줬다. 많이 가르치는 것과 많이 배웠다고 생각토록만 가르치는 것은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덕분에 내반은 한달후에 반으로 줄지를 않고 오히려 배로 늘었다. 회화반은 15명을 넘으면 무리이기 때문에 한반을 두반으로 나눠 가르치는 수 밖에 없었다. 15명씩 두반 외에는 학생을 더 받지 못한다고했으나 학생들이 자꾸 아는 사람들을 데려오고 뒤에 서있어도 좋다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서 애를 먹었다.


내가 학원에서 받는 돈은 중위 봉급의 배가 넘었다. 후배나 사병이 휴가로 집에 가야하는데 차비가 없다고 하면 선뜻 도와줬다. 수년간 대전 생활에 빚도 적잖이 쌓였었다. 59기 조후배가 "빚이 한달 봉급을 넘게되면 자포자기가 돼죠" 라고 말했었는데 내가 그지경이 됐었다. 술집 빚은 워낙 바가지를 씌운 액수였고 그간 월급날 마다 정문초소에 악착 같이 빚받으러 찾아온 마담들에게 열심히 뜯기고 남은 돈이니 그리 갚아줄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식당은 배고플때나 손님들이 오셨을 때 모시고가서 대접한 고마운 곳이니 제대 전에 갚아야지 생각하면서도 형편이 되질 않았었다. 그런데 학원강사 몇달에 형편이 돼서 한밭식당엘 찾아갔다. 매니저가 날 보더니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깜짝 놀라며 반긴다. 빚진 것을 계산해 다 갚고 일어서니 눈에 눈물까지 글썽해 식사라도 하고 가시란다. 밥을 먹고 간게 후회가 됐다. 보통 설렁탕에는 고기가 그저 몇조각만 보이는건데 억지로 들고 가시라고 손수 들고 나온 설렁탕에는 국물은 몇방울 안보이고 고기만 가득찼다.

 

버스에서 내려 학원으로 가는 골목에 젊은 부부가 하는 라면집이 있었다. 저녁마다 거기서 라면을 먹고 학원으로 갔는데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값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라면이었다. 라면 스프 대신 된장과 고추장을 푼 것 같았는데 아무리 흉내를 내보려해도 그맛이 나질 않는다.

 

학생은 대부분 민간인이었으나 인근 육군 통신부대에서 온 대위가 몇명있었고 유성쪽 어디에 있다는 여군도 몇 있었다. 한번은 비상이 걸려 가까스로 학원 시간에 맞춰 달려갔는데 숙소에 들려 옷을 갈아입을 겨를이 없어 작업복에 권총을 찬 채로 반에 뛰어 들어갔다.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대위들은 "선생님 예비역이신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뇨 현역입니다."하고 공군 영어교관이라고 고백했다. 내 신분이 들통나 학생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걱정됐었는데 다음달에도 모두 등록을 하고 나왔다. 아마 공군 영어교관이라고 하니까 좀더 전문적 인상이 들어 신뢰를 했던 것 같다. 학생중 여군 하나가 나를 쫒아 다녀 혼이 났었는데 제대후에 집근처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나 다시 쫒아다녀 떼느라고 혼이 난적이 있다.

 

제대일이 가까워 지자 양원장이 일년만 더 하고 돈을 좀 모아 집으로 가라고 했다. 지금 저녁 두시간 일하고 그만큼 버니 아침부터 가르치면 일년에 백만원은 모을수 있다고 했다. 아침과 낮에는 부인네들이 많이 나온다고했다. 그럴싸 하게 생각됐다. 그때 중위 봉급이 2만원이 채 안됐으니 백만원은 공군 4년에 받은 월급 모두 보다도 큰돈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서울로 가야한다는 말이 생각나 사양하고 집으로 왔다. 제대 후 몇개월 간 백수신세였을 때 가끔 학원이 생각 날 때도 있었으나 언젠가 돌아와야하니 역시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어쨋든 눌러 앉았더라면 아내와 인연이 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었을테니 분명히 잘 돌아 온 것이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그때가 나에게는 한철이었다.

 

그때 인연이 됐던 이들 - 나를 훌륭한 강사로 믿고 일을 시키고 좋은 조언을 해준 양원장, 나를 선생으로 믿고 반에 나오고 친구도 데려 온 학생들, 민생고를 해결해 준 라면집 부부, 심지어 나를 쫒아다닌 여군 -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준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