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ora의 훈훈한 이야기

우리 교회의 부자 가족

Young1Kim 2023. 6. 18. 07:27

(다샤 타란 씀)
1946년의 부활 주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14 살이었고 여동생 아시는 12 살, 언니 달린은 16 살이었다.  아빠는 어린 일곱 애들을 엄마에게 남기고 5년전에 돌아 가셨다. 그때는 더 큰 언니들은 시집을 갔고 오빠들도 집을 떠났다.
 
부활 주일 한달 전에 목사님이 부활 주일에 가난한 가정을 위해 희생 헌금을 하겠으니 정성껏 준비 하라고 광고 하셨다. 우리는 집에 와서 헌금할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의론했다. 우선 감자를 50 파운드 사서 그것으로 한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면 한달 식품비에서 20 달라를 절약 할 수 있었다. 되도록 불을 켜지 말고 라디오도 듣지 말고 전기료를 아끼기로 했다. 언니와 나는 집집마다 다니며 집안팍을 청소해 줬고  애들을 봐주고 돈을 모았다. 면직 고리를 15 센트에 사서 냄비 손잡이를 만들어 1 달라에 팔아서 20 달라를 벌었다.
 
그달은 우리 생애에 제일 신나는 달이었다. 매일 저녁 돈을 세며 얼마를 벌었는지 보았다. 밤에는 어둠 속에 둘러 앉아 우리가 모은 돈을 가난한 가족이 얼마나 유용하게 쓸런지를 얘기 했다. 우리 교회에는 교인이 80명 정도 있었고 목사님은 매주 성의껏 특별 헌금을 준비하라고 얘기 하셨기에 전체의 특별 헌금은 우리가 드리는 액수의 20배 정도가 될 것으로 짐작 했다.
 
부활 주일 전날 아시와 나는 동네 식품점에 가서 우리가 모은 동전을 모두 주고 깨끗한 20 달라 지폐 석장과 10 달라 지폐한장으로 바꿔 와 엄마와 언니에게 보여줬다. 우리는 그렇게 큰 돈을 본적이 없었다. 부활 주일에 새옷을 입고 가지 못할 것이지만 마음이 기뻐서 밤잠을 설쳤다.
 
주일 아침에는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1 마일 떨어진 교회에 걸어 갔다. 언니는 헤어진 신발에 판지를 잘라 넣고 걸었다. 교회에 도착하니 판지는 헤어져 떨어져 나갔고 우리는 쪽딱 젖었지만 당당하게 들어가 앞에서 두번째 의자에 앉았다. 우리 또래 계집애들이 스미스 집 애들이 새 옷을 입고 오지 않았다고 수근 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애들의 새 옷이 부럽지 않았고 우리가 부자인듯 느껴졌다.
 
희생 헌금 순서가 되자 엄마가 10 달라 짜리 한장을 헌금 접시에 놓았고 우리 셋은 각각 20 달라 짜리를 헌금 접시에 놓았다. 예배 후에는 내내 노래를 부르면서 집에 왔다. 점심으로는 엄마가 특식으로 내 온 삶은 계란 한 줄을 튀긴 감자와 맛있게 먹었다.
 
그날 오후에 목사님이 차를 타고 오셨다. 엄마가 나가서 잠시 얘기를 하고는 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 왔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도 않고 봉투를 열었다. 빳빳한 10 달라 짜리 한 장과 20 달라 짜리 석 장과 1 달라 짜리 17 장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돈을 봉투에 도로 넣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않고 마루  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몇분전 우리는 백만장자가 된듯 뿌듯했었지만 지금은 가난한 백인 거지로 전락했다.
 
우리는 행복했었고 엄마와 형제 없이 외로운 애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주 데려다 먹였다. 집에 칼이라곤 두개 밖에 없어서 돌아가며 썼다. 풍족친 못했지만 우리가 가난하다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 부활 주일에 우리가 가난 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난한 가족에게 한 희생 헌금을 목사님이 우리에게 주었으니 우리가 가난한 가족인 것이었다.
 
나는 내가 가난하다는게 싫었다. 낡은 옷을 입고 헤어진 신발을 신고 교회에 가기가 싫었다. 학교에도 가기 싫었다. 항상 우등을 했었지만 다른 애들은 내가 가난 하다는걸 이미 알았었으리라. 그 주에 우리 셋은 학교에 가긴 했지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거의 말을 안했다. 토요일 저녁에 엄마가 그 돈을 어떻게 하려나 물었다. 글쎄 가난한 가족은 돈을 어떻게 쓰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가 가난한 지도 몰랐으니까.
 
주일날 교회에 가기가 싫었지만 엄마는 가야 된다고 했다. 가는 내내 아무 말도 안했다. 엄마가 찬송가를 불렀지만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았고 엄마는 1절만 부르곤 그쳤다. 그날의 말씀은 선교사님이 전했다. 아프리카의 교회를 흙벽돌로 지었는데 지붕을 올릴 100 달라가 필요하다고 했다. 목사님이 "지붕을 위한 희생 헌금을 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언니에게 건넸고 언니는 나에게, 나는 오시에게 주었다. 오시가 헌금 접시에 봉투를 올려 놨다. 목사님이 돈을 세고는 100 달라가 조금 넘는다고 했다. 선교사님은 "이 교회에 부자 교인이 있나보군요" 하고 기뻐했다.
 
그때 깨달았다. 그 "100 달라가 조금 넘는 돈"에는 우리의 87 달라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이 교회의 부자 가족인 것이었다. 선교사님이 그렇게 말했지 않는가.
 
그후로 나는 잠시도 가난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