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 반주자 김성은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1927년에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셨어요. 어렸을 때 선교사 가족과 가깝게 지내며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분들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어요. 엄마가 영변 숭덕 여자 중학교를 다닐 때 일제가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했어요. 선교사 가족이 떠나며 피아노를 엄마네에게 주고 가서 피아노가 엄마의 일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후에 평양 숭실 전문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해요. 결혼을 하자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야했는데 미군이 배로 후퇴를 하며 교회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태워줘 어린 첫 아기를 데리고 미군 배로 제주도로 갔어요. 거기서 그 아기, 저의 오빠는 뇌막염으로 죽었고 제가 태어났대요.
전쟁 후 제주도에서 마산으로 갔다가 서울로 와서는 외할아버지가 사시는 이대 입구에 살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대 부속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4학년때 쯤 봉원동으로 이사를 와서 대신교회 등 감리교회에 다녔었는데 숭덕 중학교가 감리교 계통이었기 때문이었나 봐요. 그러다가 봉원교회에도 한번 와 보았어요.
봉원교회에서 우연히 엄마의 숭덕학교 은사이신 김한림 선생님을 만났고 선생님의 권고로 봉원교인이 되어 교회와의 인연이 시작 됐어요. 그때만 해도 교회에 반주자가 귀할 때라 곧 반주를 시작했고 다음 세대가 인계 받을 때까지 십여년 간 반주를 했어요.
우리 세대는 해방 후의 혼란과 전쟁의 아픔과 전후의 빈곤을 겪었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일제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셔서 해방과 이북에서의 탈출과 전쟁을 겪으며 네 아이를 키우셨으니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요?
저희는 1976년에 미국에 왔는데 몇 년 후에 엄마를 초청해 모시고 왔어요. 낯선 외국에 이민을 오셔서도 교회에서 피아노 봉사를 하며 보람 있게 사셨지요. 건강히 잘 지내셨는데 2019년에 잠시 앓으시다가 92세로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돈 어른들 곁에 묻혀 계서서 자주 가 뵈어요. 다음 주에 가서 엄마 얘기를 봉원교회 소식지에 썼다고 말씀 들릴꺼야요.
(한혜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