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극심한 어려움 중에 나타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진정한 가치를 갖은 한 분을 알았다. 그리고 그분과 70년을 같이 지내는 특권을 누렸고 그 분의 진정한 가치를 보았다. 바로 내 어머니다.
어머니는 1918년 일정 치하에서 나으시고 3년 전 99세에 작고하셨다. 어릴 적 어머니의 첫 기억은 6.25 전쟁이 시작 되고 몇일 지나서 였다. 인민군 네 명이 집 마당에 들어와 사방에서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며 아버지를 내어 놓으라고 했다. 어머니는 "너희들에게 말해 줄 수 없으니 총을 쏠라면 쏴라" 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세 살의 어린 나이에도 정말 쏘면 어떻 하나 겁이 났었다. 그러나 늠름한 말에 군인들은 깜짝 놀랐고 슬그머니 총을 내리고 기가 죽어 나갔다.
나는 이렇게 고지식할 정도로 거짓말을 못하는 어머니 곁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항상 약한 사람에게는 인자하고 부드러웠고 강한 자 앞에서는 강하셨다. 전쟁 후 세상이 아직 어지러울 때 마을 어른들이 어머니에게 통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동네 모임이 있을 때 수많은 노인들이 우리집 앞마당에 모여 젊은 부인이 하는 말을 경청하던 생각이 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어머니와 이화 여전 동기이신 교장 선생님이 자모회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해서 가끔 학교에 나타나셨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치마저고리의 검소한 차림으로 학교에 오는 어머니를 보고 다른 엄마들 같이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왔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했다. 후일에 그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얼굴인 걸 깨달았다. 열 시이모와 함께 시집살이를 호되게 시킨 시어머니가 치매로 정신을 놓은 후 십 수 년을 대소변을 받아내며 한번도 귀찮아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학사 장교가 됐을 때는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생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느 주말 집에 가니 거지들이 부엌에 들어와 몇 톨 남지 않은 쌀을 제 것과 같이 퍼가고 있다. 어쩌다 불행한 일을 겪고 거지가 된 사람들이 아니고 직업 거지인 것 같았다. 나는 군복의 힘을 빌려 호통을 쳐 거지들을 내 쫒으려 했다. 내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어머니가 달려 나와 “내버려 둬라. 오죽 배가 고프면 우리 같이 없는 사람에게서 쌀을 가져가겠니.” 라고하신다. 어머니는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서도 쌀을 뺏어가는 욕심 많은 인간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들에게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보냈다.
미국에 올 때 6개월 난 첫아이를 어머니께 맡기고 왔는데 일년 후 직장에서 어느정도 안정하자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오셨다. 나는 노인들이 애들 봐주는걸 당연하게 아는걸 마땅치 않게 여겨 봉급을 받을 때 마다 조금씩 떼어 드렸다. 어머니가 계시는 동안 작은 집을 사게 되자 어머니가 그동안 드렸던걸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다가 집사는데 보태라고 내놓으셨다. 극구 사양을 했으나 네가 미국에서 집을 사는걸 보고가니 기쁘다며 받지 않으셨다. 그때도 고마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돈을 한국으로 가져 가셨으면 어려운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을 텐데 나에게 돌려 주셨으니 어머니는 그야말로 갖은 모든걸 나에게 주신 것이었다.
후일에 부모님을 이민 초청으로 모셔왔고 세 집 애들을 다 키워 주시고는 두 분이 아파트에 사셨다. 아버지의 치매로 어머니가 감당하기 힘든다는 걸 알았을 때 두 분이 같이 계시게 하는 건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양로원에 모시게 됐다. 그후 혼자 계시던 어머니가 우편물을 갖으러 집밖으로 나가시다가 넘어져서 엉치뼈를 부러뜨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로는 우리가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편하게 사시게 된 건데 자꾸 당신도 양로원에 들어가겠다고 조르신다. 며느리가 어린 소녀일 때 교회에서 만나 남과 같지 않은 사이이고 과거에 우리와 같이 사신 적도 여러 번 있는데 왜 자꾸 나가겠다고 하시나. 당신에게 다정치 못했어도 남편을 혼자 양로원에 있게 하는게 맘 편치 않으셨던가.
다른 노인들은 양로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결국 들어가서도 자식들이 찾아가면 차에 먼저 올라타고 집에 가겠다고 성화를 한다는데 어머니는 당신 발로 걸어 들어가셨다. 처음에는 꽤 먼 곳에 모셨다가 우리 삼남매의 집에서 중간 지점에 있는 곳에 모실 수 있었고 아버지를 어머니의 양로원으로 모시고 왔고 그후에 아버지를 어머니 방으로 모시고 왔다. 그렇게 두 분이 같이 계시게 하는데 거의 일년이 걸렸다. 아버지는 마침내 행복을 되찾으셨다. 나는 교회에서의 책임을 벗게 되었기에 교회를 가지 못하는 부모님에게 교회를 가져가겠다고 생각하고 동생 네와 양로원에서 주일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예배를 볼 때는 치매 전의 아버지로 돌아가셨다. 찬송가를 예전과 같이 힘있게 부르시고 기도도 예전과 같이 하셨다.
2년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를 찾아가 “어머니, 이제 집에 갑시다”했다. 어머니는 “가긴 어딜가니? 난 여기가 좋다”하며 돌아앉아 펼쳐 놓은 성경을 보셨다. 아니 거기가 좋다니? 예상치 않았던 반응에 한동안 할 말을 잊었다. 어머니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집으로 다시 모시고 오지 못하니 매일 퇴근 후 찾아 뵙기로 작정을 했다. 그러는 동안 31년을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며 또 다른 직장엘 파트 타임으로 2년간 다니고 있었는데 새 직장에서 풀 타임으로 일을 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젊지도 않은 나이에 두 일을 하기는 너무 힘들어 새해부터는 두 직장 중 하나를 선택을 하려고 생가하는 중이었다. 나는 어머니 계시는 데가 먼저 직장에서 보다 새직장에서 가까워 먼저 직장에서 은퇴를 하고 새직장으로 아주 옮겼다. 그리고는 웬만한 급한 일이 있어도 어머니에게 가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양로원에 들어간 분들이 2년을 넘기지 못한다고들 했다. 어떤 이는 어머니가 양로원에 들어가신 후 통 말을 않는다고 걱정을 했다. 노인성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이의 어머니는 곧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10년을 사셨다. 우울증은 조금도 없었다. 어떤 보람이 있으니 좌절치 않으시는 것일 텐데 무슨 보람일까. 거기 혼자 계시는 것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다는 보람이었을까.
어머니는 방안에서 성경을 보시며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셨지만 그곳에 같이 있는 이들은 물론 의료요원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 옆자리가 비면 들어오려고 줄을 섰다. 옆자리는 물론 그 자리의 할머니가 돌아 가셔야 비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 간 많은 할머니들이 어머니 방을 거쳐갔다. 어느 날은 옆자리의 할머니가 밤새 소리를 지르고 뭘 내던지고 해서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해서 그 할머니에게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태풍이 와서 혼났다고 한다. 그 할머니와 같이 지내시기가 힘들 것 같아 간호원에게 말하겠다고 했더니 내버려 두라며 “불쌍타” 고 하신다. 밤새 잠을 못 자게 괴롭힌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어찌 드는 것일까.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다른 할머니가 들어왔는데 텔레비존을 밤낮으로 크게 틀어 놔 좀 작게 하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할머니가 얼마나 밉던지.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가 그 할머니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고 있다. 상태가 안 좋아져서 혼자서 음식을 떠먹을 수가 없단다.
한번은 양로원에서 전화가 와서 옆자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가족이 시신을 찾아가질 않는다고 다른 방으로 임시로 옮겨 드리겠다며 어머니에게 말해 달라고 한다. 어머니를 바꿔 달래서 다른 방으로 옮겨 드리겠단다고 하니 “일 없다. 여기 그냥 있을란다.” 하신다. 전화한 간호원이 혀를 내두른다. 그래서 그 할머니와 두 밤을 더 지내셨다. 허긴 죽은 사람은 밤새 소리를 지르거나 텔레비존을 크게 틀거나 하진 않았을테니 잘 주무셨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동생 네와 같이 어머니와 예배를 계속 봤는데 예배 인도는 내가 했지만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더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 영적 부유함과 물질적 부유함에 대해 어머니의 사심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됐다. 우리 중에는 물질로는 부유하지만 영적으론 지극히 빈곤한 사람도 있고 물질로도 영적으로도 빈곤한 사람이 있다. 어머니는 육적으로는 극히 빈곤하셨다. 갖은 재산이라고는 작은 설합장에 들어있는 몇가지 물건과 옷장의 옷 몇 벌 뿐이었다. 그러나 영적으론 우리 누구보다도 부유한 분이었다. 자진해 겪으시는 어려움을 즐거이 맞으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생전에는 매일 가 뵈었지만 돌아가신 후에는 매주일 가 뵌다. 내가 해방, 피란, 전쟁, 군대생활, 이민 등으로 우리 애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한평생을 살았다면 일정 치하에서 나으시고 고등교육을 받으시고 전쟁중 어린 애들을 감싸시고 키우고 공부 시키시고 이민 오셔서는 손주애들 까지 키워주신 어머니의 한평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덤 앞에서 눈을 감고 생각한다.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어머니를 본받아 바르게 살려고 한다. 나중에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나의 외동딸은 할머니를 많이 닮았는데 그걸 귀하게 알고 할머니를 많이 존경하고 첫 애의 이름을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 손녀애도 증조할머니가 특별하신 분이신 걸 알고 어른들이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도 그 할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자식과 손주와 증손주를 통해 살아 계신다. 우리 후손들이 할머니를 닮아 바르게 살다가 후일에 할머니를 다시 반갑게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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