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교회 소식지 기고문 10

25.01 미국 이민 강행 하다

꿈 같은 신혼에서 깨어날 무렵 언제나 우리의 검소한 집이나마 갖을 수 있을까를 생각 해 봤다. 1970년 대에는 이자율이 20%를 넘어 집을 사려고 융자를 받는건 비현실적이었고 돈을 모으거나 주위에서 빌리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기댈 데도 없었고 남에게 손 벌리는 성격도 못 되었기 때문에 둘이 벌어 최소한으로 먹고 살고 양가 부모님 생활을 도와 드리고 남는 돈을 모으면 몇년 후에나 집을 살 수 있을까 계산을 해 봤더니 50년이 걸릴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또 내가 다니던 노스웨스트 항공사 예약부의 대우는 좋았지만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참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불규칙 하게 뛰고 곧 쓰러질 것 같은 증세가 자주 일어났다. 염방자 사모님의 소개로 세브란스 병원에 가..

24.10 작은 성취 반세기

우리 집은 장로교회와 깊은 인연을 갖어왔다. 아버지는 일정 시대 일본의 관서공대 건축과에서 교육 받고 미국인 보리스 William Merrell Vories 선교사의 일본 오미 하찌만 설계 사무실에서 훈련 받은 건축 전문가였다. 해방 직전 귀국 해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건축 전문가로 전국의 교회, 고아원, 양로원, 신학교, 대학교 등의 신축 및 보수 일을 하다가 전쟁 후에 자신의 건축 회사를 열었다. 전쟁 통에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으니 너도 나도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할 때였다. 아버지 사무실에 건축을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아버지는 교회와 학교를, 그중에서도 장로교 계통을 우선으로 택했다. 상업적 건물이나 개인의 주택은 아주 가까운 사람이 부탁하는게 아니면 손을 대질 못했다. 아버지가 설..

24.07 어머니

성경에 어느 누구가 의로운 분이었었다는 귀절을 볼 때 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의 첫 기억은 6.25 전쟁이 시작 되고 몇일 지나서 였다. 인민군 네 명이 집 마당에 들어와 사방에서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며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쏘겠다고 위협했다. 어머니는 “너희들에게 말 해 줄 수 없다. 쏘거라.” 라고 늠름하게 말했다. 나는 세 살의 어린 나이에도 이런 상식 밖의 대답에 깜짝 놀랬고 엄마가 왜 모른다고 하지 않고 말 할 수 없다고 하나, 정말 쏘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 했었다. 그러나 30을 갖 넘은 젊은 엄마의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는 군인들이 나보다 더 놀랬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며 몇마디 수근 거리더니 슬그머니 총을 내리고 나갔..

24.04 반세기전 중고등부 수양회

1975년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이었다.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송추로 수양회를 갔다. 해마다 유년부 여름 성경학교와 학생부 수양회를 인도 했겠지만 특히 이 해의 수양회가 기억에 남는 것은 신혼 부부로 교회 그룹을 처음 인솔해 갔었기 때문이고 또 비극 내지는 어려움이 될 수 있었던 두 사건이 무사히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 돈을 되도록 절약하기 위해 현지 학교에서 숙박을 하도록 교섭을 했고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학교 버스를 운전하는 분과 연락이 닿아 믿을 수 없으리만치 좋은 가격에 데려다 주기로 해 준비가 잘 되었다. 현지에 도착해 모든 순서가 순조롭게 진행 되었는데 여가 시간에 놀다가 여학생 한명이 그만 물에 빠진 것을 남학생들이 뛰어 들어 물 한가운데 바위에 건져..

24.01 반주자 김성은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1927년에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셨어요. 어렸을 때 선교사 가족과 가깝게 지내며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분들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어요. 엄마가 영변 숭덕 여자 중학교를 다닐 때 일제가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했어요. 선교사 가족이 떠나며 피아노를 엄마네에게 주고 가서 피아노가 엄마의 일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후에 평양 숭실 전문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해요. 결혼을 하자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야했는데 미군이 배로 후퇴를 하며 교회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태워줘 어린 첫 아기를 데리고 미군 배로 제주도로 갔어요. 거기서 그 아기, 저의 오빠는 뇌막염으로 죽었고 제가 태어났대요. 전쟁 후 제주도에서 마산으로 갔다가 서울로 와서는 외할아버지가 사시는 이대 입구에 살게 되..

23.11 60 년대 봉원교회의 주일 하루

주일 아침 어린이 예배 30분 전에 준비 종을 친다. 대부분 가정에 시계가 없고 교회 종소리가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에 쳐야한다. 평일에는 동네 사람들이 새벽 기도 예비 종소리를 듣고 깨어나 일 나갈 준비를 한다. 어린이 예배가 시작되면 선생님들이 뒤와 옆에 서서 일주일 만에 교회에 모여 흥분으로 들뜬 아이들을 가라 앉히며 예배를 시작한다. 예배 후에는 각 반으로 나뉘는데 몇 반은 근처 교인들 댁으로 가고 나머지는 교회의 긴 의자를 몇 개씩 배당 받아 성경공부를 한다. 분반으로 나뉘기 전에 선생님들에게 다른 반을 생각해 조용히 가르치라고 당부를 하지만 점점 목소리들이 커진다. 옆반에서는 상돈이가 너무 열정적으로 가르쳐 내 반에 방해가 되지만 그 열정이 존경스럽다. 결국 아이들이 장성 한 후..

23.09 되찾은 집사의 직분

내가 사는 아틀란타 지역에는 나를 장로로 부르는 이들도 있고 전도사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나는 봉원교회에서 선생이었다가 장가 든 후 집사의 직분을 받았었는데 29살 되던 해에 미국에 와서는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의 연합장로교회에서 다시 선생이 되었다. 나를 아는 장로 한분에게서 내가 한국에서 청소년층을 지도 했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김득렬 목사님이 나에게 영어권 중고등부를 맡기셨다. 한편 교회 밖 사회에서는 아직 안정 된 직장을 찾아서 닥치는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일년 후 델타 항공에 취직 되어 비행장 램프에서 일했다. 일단은 생활이 안정 됐고 4년 반 후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선발 되어 남부 아틀란타의 본사에 와서 교육을 받고 근무하게 됐다.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에서 역시 영어..

23.07 봉원 교회 창립 65년 기념 행사를 보며

오늘은 봉원 교회 창립 65주년 기념 음악제를 보았다. 지구 저편에 있는 모교회의 행사를 거의 실시간에 참여 한다니 좋은 세상이다. 단상에 올라 온 교인들은 대부분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남과 같지 않고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 온 동역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의 소년기와 청년기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던 봉원 교회를 이어 받아 소중히 지켜 온 이들이고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그리스도와 같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름이 없다. 홍경만 장로님의 65년사 출판 기념사 말씀 대로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인간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그리스도에게는 다 같은 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47년 전에 한국을 떠난 우리 부부는 봉원 교회의 “예전 교인”이고 서울 봉원동의 교회에 ..

23.05 타지로 떠난 교인들이 흠모하는 교회

나는 내가 속했던 단체나 기관에 깊은 애정을 갖는다. 다녔던 학교와 일했던 직장이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고 그때의 사람들과 아직도 교류를 한다. 남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걸 근래에야 알았다. 그러니 중 1 시절 부터 18년 후 미국에 올 때 까지 영과 육의 성장을 지켜준 봉원 교회에 남다른 애정을 느끼는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평범한 교회의 인연 이상으로 애정을 갖게 하는 이유가 또 있다. 어느날 목사님이 사무실에 부르셨다. “김선생, 취직도 했으니 이젠 장가를 가야할 것 아니오?” 나는 “결혼은 생각치 못했어요.”하고 대답했다. 학교를 일찍 다녀 대학을 졸업하고 4년 반의 공군 장교 복무를 마치고 직장에 취직한지 두해 됐는데 아직 20대였다. 그러나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누굴 생각하고 계시는..

23.03 봉원교회의 옛이야기

이대부중에 입학 한1958년 첫 여름방학 때 신당동에서 신촌으로 이사 와서 첫 주일에 신성 교회에 나갔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장로교회였다. 천막지붕에 흙벽돌 벽에 맨 흙바닥의 교회는 처음 간 곳 같이 낯설지 않고 아늑하고 다정했다. 젊은 이원태 전도사님은 부임 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내 평생 신앙의 지도자로 존경하는 이 목사님을 처음 대면하는 날이었다. 주일이면 산동네에서 수백명의 아이들이 교회에 몰려 왔다. 부모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서도 애들이 교회에 가는건 좋게 여겼다. 아마 교회에서 나쁜건 가르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였을께다. 실제로 어른들이 집앞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아이들을 보살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적도 있다. 전쟁이 끝난지 몇 년 되지 않아 모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