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이야기

성경을 어떤 자세로 읽어야하나

Young1Kim 2014. 9. 11. 22:35

나는 예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녁과 주말에 신학교를 다닌적이 있다. 학위를 받을 학점을 거의 다 받고나서 중단했는데 결국 목회의 길로 들어서지 못했지만 그때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정의 투자를 내나름대로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이었다고 생각하고 헛되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내가 신학을 공부한 것을 알게되면서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알고싶어서 묻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시험하려고 묻는다. 알고싶어 묻는 예는 "세상이 정말 6일만에 창조되었나" 등등이고 시험하려고 묻는 예는 "너는 세상이 정말 6일만에 창조되었다고 믿느냐" 이다.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지 많은 이들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그외에 이런 질문들이 많다. "율법서를 모세가 썼나?" "요나가 정말 물고기 배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왔나?" "마리아가 정말 처녀로 아이를 배었나?" "예수님이 정말 사흘만에 부활하셨나?" "예수님이 정말 승천하셨나?"

 

이렇게 "정말"이냐를 묻는 것은 지금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 사실들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가를 알고싶어서이리라.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많으면 자기도 믿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신앙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가 물리적, 실제적, 육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물리적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의 저자가 모세였던 누구였던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쓴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은 과학의 논문이 아니고 "성경"이다. 성경은 육적이 아니고 영적 교훈을 위해 쓰여졌다.

 

성경은 어느 작은 부분이고간에 저자가 심심해서 다른 할일이 없어서 쓴것이 아니다. 또 저자는 수천년 후에 읽을 21세기의 우리를 위해 쓰지도 않았다. 그는 (또는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기 시대, 자기 공동체를 위해 썼다. 왜? 그글을 써야만 하는 그 공동체의 절실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느 귀절이고 읽을때 물을 첫 질문은 "저자가 이 글을 써야만 했던 그의 공동체의 절실한 필요가 무었이었나?" 이다.

 

두번째 질문은 "당대의 공동체는 이 글을 어떻게 이해했나" 이다. 그 공동체는 그 글에 찬성하고 공감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글을 즉시 없애버렸을 터이니까. 그 글을 어떻게 찬성하고 공감했기에 찢어 버리지 않고 오히려 손으로 복사해 다른 지방의 공동체와도 나누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을까?

 

세번째 질문은 "수천년 전 쓰여진 이 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나?" 이다. 우리는 이 글이 쓰여진 세상과는 많이 다른 세상에 살고있다. 이 글이 아직 효력을 잃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상의 세 질문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위한 것이다. "이 글이 우리에게 어떤 영적 가르침을 주나?"

 

독자 스스로가 생각 할 수 있도록 이 네 질문의 예는 일부러 쓰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육에 속해 있으므로 육의 것을 소홀히 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된다. 할수 있을 때 까지 열심히 일하고 육신의 건강을 위해 애써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에 두어야한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나 그럼으로 영적인 것을 망가뜨린다면 삶의 목표가 틀린 것이다. 위의 질문들이 첫 세개로 끝난다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번째 제일 중요한 질문을 생각하고 나름대로 고민해야한다.

 

어느 종교의 경전이고를 이해하려면 위에 설명한 자세를 갖어야한다. 왜냐하면 경전은 사람이 펜과 잉크를 사용해 손으로 쓴 육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육적인 것을 걸르고 영적인 것만 남긴다면 모든 경전이 다 같은 목표를 가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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