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이야기

나와 교회

Young1Kim 2017. 7. 31. 05:12
  • 1950년대: 나는 장로교인이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장충동에 있는 신일 교회에 다녔다. 후에 울릉도에 가신 의사 이일선 목사님이 담임이셨다.
  • 1960년대: 중1 여름방학때 학교에서 가까운 신촌으로 이사가며 봉원동 사거리에 천막을 치고 모이던 신성교회에 다니게됐다. 얼마 안있어 이원태 전도사님이 부임하셨다. 교회는 연대 땅 끝자락에 흙벽돌 교회를 짖고 옮겼다가 봉원사 끝자락에 자리 잡고 이름을 봉원교회로 했다. 이 교회에서 자라며 중고등학생회장, 청년회장, 주일학교 교사, 중고등부 교사, 성가대원등 많은 일에 동참했다. 이원태 목사님을 신앙 멘토로 모시게된건 큰 특권이었다. 이목사님은 은퇴하시고 교인들이 찾아오기 어려운 평창에서 살고계신다.
  • 1976년 미국에 와서는 디트로이트 연합장로교회에서 Youth Group을 조직해 인도했다.
  • 조성걸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실때 도와드리기 위해 따라나왔다. 조목사님은 후일 북가주와 스페인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몇년전 별세하셨다.
  • 1982년 아틀란타 본사로 전근 온 1년후 식구를 이사시킬수 있었다. 잠시 제일 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와 성가대 봉사를 하다가 원래 교단인 연합장로교회로 찾아갔다. 연합장로교회에서는 영어목회에 전념했고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를 지도했다. 그때는 대부분의 한인 교회에서 영어 예배가 교육부 아래 있었다. 장로안수를 받고 English Ministry [EM] 부를 만들어 맡았다.
  • 1990년 집사람이 디트로이트 교회 친구들의 도움으로 West End지역에서 남자옷가게를 냈다. 근처에 있는 International Theological Center [ITC]의 MDiv 과정에 입학했다. ITC는 여러 흑인 신학교가 교수진과 시설을 공유하는 학교로 훌륭한 교수가 많았다.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때 한국이나 북한팀 통역을 맡을 기회를 저버리고 여름 내 콜럼비아 신학교에서 희랍어를 아침에 배우고 오후에 일을나가 저녁 늦게까지 일을 했다. 졸업에 90여 학점이 필요한데 1997년경 까지 70여 학점을 이수하고 더 다니지 않았다.
  • 노회의 Committee on Preparation for Ministry회원으로 봉사했다. 민주주의적 회의 진행의 맛을 처음 봤다.
  • 1995년 신시내티에서 열린 총회에 장로 총대로 참가했다. 민주주의적 회의 진행의 참 맛을 보고 장로교단 PCUSA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다.
  • 연합교회의 장로직을 2년만에 사임하고 베다니교회 전도사로 부임해 장년부를 인도했다. 도미 20년간 젊은이들의 영어목회에만 전념해 나와 같은 1세와의 친교가 필요했다. 김진홍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나도 사임했다.
  • 2005/6년 교회에서 이탈한 교인들을 1년 가까이 인도했다. 처음으로 매주일 설교를 준비했다.
  • 새교회가 원하던 목사님을 모시게 되며 사임하고 부모님이 계시던 양로원에서 주일예배를 시작했다. 기성교회에 대한 반감에서가 아니고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에게 찾아가는 교회도 있어야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 2007년에 아버지가, 2017년 6월 어머니가 별세 하심으로 양로원에서의 십여년간의 모임은 끝나고 일단은 집에서 가까운 200년 전통의 라즈웰 장로교회 교인이 되었으나 한두번 출석한 후 팬데믹이 시작됐다. 대면 예배는 아직 사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