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시절 이야기

후보생 시절

Young1Kim 2021. 5. 1. 08:20

후보생 시절은 일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4개월로만 기억 되는데 그러기에 훈련이 끝났을때의 성취감이 더욱 귀중했다. 나는 원래 키만 컸지 약골이었는데 입교 전 몇달을 교회친구가 날 데리고 동네를 매일 뛰어서 준비 시켜준 덕을 톡톡이 봤다. 또 하나하면 굽히고 둘하면 펴는 팔굽혀 펴기 첫 기합 후에 내 다음다음 자리의 정후보생이 "야 너 그렇게 하는게 아니데이"하면서 먼저 훈련소를 다녀간 선배로 부터 받은 요령을 가르쳐줘 많이 도움이 되었다.
 
정후보는 애인이 보내오는 담배를 자기가 다 갖고 있으면 남들에게 뺏기니까 나한테 반을 맡아 달라고 했는데 나한테 준 담배는 결국 내가 다 피우게 됐어도 불평 않고 다음에 또 담배가 오면 나에게 반을 주곤 했다. 몇년전 한국에 갔을때 천수를 만나러 부산에 갔는데 같이 나온 부인이 너무 젊어보여 혹 재혼한게 아닌가 싶어 담배 얘기를 꺼내지 못하다가 그부인이 그때의 애인이었건걸 확인한 후에야 50년 늦은 감사 인사를 드렸다.
 
임관후 내가 서울에서 두달간의 교육특기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정소위는 아직 정비특기 교육을 받고 있어서 룸메이트를 하며 "내 바둑 가르쳐 줄테니 영어 가르쳐 다고"해서 영어는 가르쳐준 기억이 없지만 바둑은 배웠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는데 한번은 단 본부에서 정문 초소까지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내려가기로 하고 내가 먼저 내려갔는데 천수는 정문을 지나 서질 못하고 길건너에 있는 자전거포를 들이받아 앞바퀴가 많이 휘었다. 길에 차가 지나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휘어진 바퀴는 그 자전거포에서 고친걸로 안다. 하하.
 
저녁 점호는 대개 무난히 났다. 두 무릎을 붙이고 똑바로 서라고들 했는데 정후보생 다음 자리의 후보생이 도무지 무릎을 붙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휜 다리가 훈련 받는 때라고 펴질까. 교관들이 내무반으로 들어오면 유독 눈에 띄는 그 후보생에게로 달려가 줘패는 바람에 나는 그냥 지나갔다.
 
같은 7구대 송후보생은 충남 출신으로 순박한 사람이었는데 영내 언덕에 앉아 대전서 유성간을 달리는 버스를 내려다보며 입대전까지도 그 노선에서 소매치기를 했다고 나한테 늘상 말했다. 나는 재미로 지어낸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아 그렇냐고 맞장구를 쳐줬다. 송후보생은 간지럼을 지독히도 탔다. 아침 점호때 횡대로 서면 송용진이 내앞에 서게됐다. 하루는 모두들 도열하고 교관들이 줄지어 나올때 한발 앞으로 나가 송용진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송은 "어이~~"하고 소리를 지르며 대여섯 걸음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까지 반응을 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모두들 눈알 굴리는 소리도 못내는 엄숙한 판에 어이 소리를 있는대로 지르고 뛰어나갔으니 이젠 죽었구나 하고 기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아무일도 없었던것 같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휴우. 송은 훈련 후엔 다시 못봤다.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지금은 귀농을 했는지. 소매치기의 본업으로 돌아갔는지. 간지럼은 여전히 타겠지.
 
그시기를 즐기며 구보, 행군, 사격등 훈련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한국 군대의 정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한게 유감이다. 하여간 훈련이 힘들었기에 당시의 동료들이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더욱 귀중할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