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대학에는 ROTC 프로그램이 없어서 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군복무를 하려면 공군이나 해군의 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었다.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해 공군을 선택했다. 1968년 3월 4일 부터 18주 기본 군사훈련을 받고 7월 2일에 소위로 임관했다. 교육특기를 배정 받고 서울 공군본부에서 두달 간 특기교육을 받은 후 기본 군사훈련을 받았던 대전 기술교육단으로 다시 내려가 통신학교 영어교육대대에 부임했다. 외국에 나가 훈련을 받을 장교와 하사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게 주 업무였다.
우리 대대에는 교관이 거의 모두 장교였고 하사관이나 사병이 몇명 없었으나 통신학교에는 장기 특기교육을 받는 사병과 하사관 피교육자가 700 여명이 있었다. 낮에 교실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그다지 힘들다고 할수 없었으나 한달에 한번꼴로 당직을 서야했다. 주중 당직은 아무래도 부대 안에 있어야 했으니까 생활에 별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주말 당직은 주말에 서울에 갈수 없어서 불편했다.
첫 당직은 주말 당직이었다. 700여명의 며칠 간의 운명이 나에게 달렸다. 나는 생전 처음 주어진 그렇게 큰 권한으로 우리 모두가 다 즐겁고 편안하고 안전한 주말을 보내고 싶었다. 당직 하사관을 불러 입대 후 한번도 집에 가지 못한 사람이 몇이나 되나 알아보라고했다. 그해 1월에 김신조 등 북한 공비 일당이 남하해 난동을 부렸을 때라 전국이 비상상태였고 사병들의 외출이 일절 금지됐었다. 당직하사관이 돌아와 입대 후 반년 이상 집에 한번도 가지 못한 사람이 십여명이 된다고 보고했다. 나는 그중 일요일 저녁 점호 때 까지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외출 시키라고 지시했다. 곧 연병장에 십여명이 외출 준비를 하고 집합했다. 내가 "니들 일요일 점호때 까지 돌아올꺼지?" 하고 물었더니 모두들 들떠서 큰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토요일에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당직 사령이 닥아와 첫 당직이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아 참 입대 후 반년 이상 집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애들이 십여명이 된다고 해서 외출을 보냈습니다."했더니 사령은 "어? 잘했어." 하고 건성 대답하더니 내 말의 내용을 잠시 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나며 "뭐라고? 지금 전면 외출 금진줄 몰랐나?" 하고 소리쳤다. 나는 "저에게 애들을 외출시키면 안된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했더니 "정문에서 헌병들이 내보내지 말아야 했는데 왜 내보냈는지 모르겠네. 한명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나와 김소위는 깜방 신세야" 하면서 안전부절했다. 나는 감옥에 가더라도 애들을 집에 보내준 걸 후회하지 않았지만 직업군인인 사령으로서는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토요일 저녁에는 모두가 연병장에 모여 여흥시간을 갖었다. (그런 시간을 군대에서 뭐라고 불렀었는지 잊어버렸다.) 마치 자기가 외출을 다녀온것 같이 흥분이 되고 얼굴들이 상기돼서 노래를 하며 춤을 추며 놀았다. "지그닥닥닥 지그닥닥 로맨스깊은 밤에..." 나에게도 노래를 하라고해서 "I've been working on the railroad" 소년단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노래였으나 동료 사병들을 외출 보내준 사관에게 감사하는 표시로 신나게 흥을 돋궈줬다. 냄비를 엎어놓고 북 같이 치는 몇명이 가히 프로급이었다.
일요일 저녁 연병장에 어두움이 드리울 때 당직하사관이 모두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내심 걱정됐는데 모두 돌아 왔다니 맘이 놓였다. 연병장에 나가 어서들 들어가 쉬라고 했다. "네!" 하고 흩어지는데 한놈이 당직 사관실에 따라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도 큰 인삼이 들어있는 병을 내밀며 자기집이 금산이고 자기가 몇대 독자인데 집에 가니까 아버지가 감격해 병장속에 집안 대대로 물려온 인삼주를 사관님 드리라고 주어서 가져 왔다고했다. 나는 "그런걸 바라고 널 집에 보내준 게 아니니 그거 아버님께 도로 갖다 드려라"했다. 그는 "아니.. 사관니임" 하면서 한발짝 앞으로 닥아 왔다. 나는 "군대생활을 반년이상 한 놈이 아직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걸 못배웠냐"하고는 "밖에 나가 빳다 하나 가져와"했다. 그놈은 빳다를 맞고 인삼주 병을 가지고 나갔다.
제대하고 민간직장에서 일할 때 내 권한으로 어느 회사에 편의를 봐줄 기회가 있었다. 그회사의 여직원 두명이 양담배 몇상자를 가지고 와서 부장님이 드리라고해서 가져왔다고했다. 나는 "내가 해드릴만한 일이니까 해드린거지 댓가를 바라고한건 아니니 부장님께 도로 갖다 드리세요"했다. 여직원들은 "아니.. 이건 말이지요오.."하면서 닥아왔다. 나는 "아가씨들이 사회에서 배워야할께 얼마나 많은데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남의 순수한 호의를 받아들이질 못하고 댓가를 줘야한다는 태도 부터 배워서 되겠어요?" 하고 나무랬다. 여직원들이 얼굴이 빨개져 담배 보루를 들고 나갔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인삼주가 생각난다. 십중팔구는 하사관들이 뺏어 마셨을 것 같다. 나는 한평생 그리 큰 업적을 이루거나 공을 세우는 일은 못했더라도 남의 약점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나에게서 빳다를 맞은 사병과 호되게 야단을 맞은 여직원들로 인해 이세상이 조금 더 깨끗한 세상에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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