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 한국엘 오려고 생각했었다. 지난 봄에 와야할 일이 생겼었는데 그 일이 해결되는 바람에 여행을 취소했다. 대신 오스틴에 손녀 브룩을 보러갔다. 이번엔 마침 출장 기회가 생겨 오게됐다. 우린 40년전인 1976년에 미국에 왔다. 돈도 없었고 직장도 막연했다. 젊긴했어도 그리 건강친 못했다. 7월 9일에 알라스카에서 입국했는데 이민국 직원이 옆자리의 동료를 부르며 소리 지르던 것이 생각난다. "Hey, Joe, their visa expires today!" 비자를 받고 차이피일 미루다가 만기일에 입국한 것이다. Standby로 탑승하는 입장에서 비행기를 못탔거나 비행기가 기관문제 등으로 떠나지 못했으면 아마 그 복잡했던 수속을 다시 시작하지않고 이민을 포기했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디서 뭣을 하고 있을까.
시카고에 도착했을때에는 디트로이트 행 비행기가 떠나버려 밤을 거기서 지새고 다음날 아침 먼친척 아주머니 댁으로 갔다. 아주머니가 부탁한 물건을 가져오지 못한데다 아저씨가 그전날에도 공항에 나왔다가 헛탕을 친후 다음날 아침 다시 나와야해서 편치못한 미국 첫날을 보냈다. 거기다가 인수 선배내외가 시내구경을 시켜준다고 데리고 나갔다가 뒷차에 받히는 사고가 났다.
그후 한국에서 갖었던 직장 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5년후엔 그 직장에서 좋은 직분을 받아 26년을 더 일한 후에 정부로 자리를 옮겨 이번에 정부 일로 출장을 오게 되었으니 이민 40주년이 잘 기념되었다. 또 일에 대한 평가를 좋게 받았다. 오고 가는 비행기를 디트로이트에서 갈아타게돼 이민 첫날의 재연이 잘 되게됐다. 일은 이틀만 하고 전후 거의 3주를 휴가로 놀다가 내일 돌아간다. 그전에는 빨리 돌아가려는 조바심이 있었는데 이번엔 출장 일주일도 있고 해서 이런 글도 쓰고하며 여유있게 지냈다. 보고 싶었던 친척친지를 거의 다 만나고 어떤 이들은 여러번 만나기도 했다. 자주 오는 편인 나를 항상 반겨주는 이들이 고맙다. 그런데 나한텐 밥값을 내지 못하게하는게 한가지 유감이다. 내 주위에서 김영란 법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종전과 달랐던 한가지는 작년까지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젊은 이들이 좌석을 양보하질 았았었다. 마치 "저기 노약자 석에나 가서 앉지 왜 여기와서 기웃거리나"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이번엔 많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했다. 한국인의 노인에 대한 태도가 일년만에 바뀌었을 리는 없고 아마 내가 더 늙어보이기 때문인가보다. 어쨋든 바람직한 변화이고 고마운 일이다. 나도 나보다 연로해 보이는 분들께 자리를 양보했다. 내가 다녀본 곳 중에서는 프라하에서 사람들이 많이 자리를 양보했었다. 그땐 내가 10년 이상 덜 늙은 때였었다. 그래서 그도시에 대한 기억이 지금까지도 좋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정다운 친구들과 나이드는 이야기를 나눴다. 20년 이라면 그리 긴 세월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민생활 40년의 반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내가 90살이 된다는건 아주 까마득한 비현실로 느껴진다. 허긴 20년전에 내가 70 노인이 된다는게 받아들여졌었을까. 이제는 살림을 줄이고 단순하게 살 때다. 집에 돌아가면 쓰레기부터 내다 버려야겠다.
친구들아 떨어져 산 40년 동안 나올때마다 한결같이 반겨줘 고맙다. 서로 건강들 잘 챙기고 곧 또 반갑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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