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교회 소식지 기고문

25.01 미국 이민 강행 하다

Young1Kim 2025. 1. 10. 00:22

같은 신혼에서 깨어날 무렵 언제나 우리의 검소한 집이나마 갖을 있을까를 생각 봤다. 1970 대에는 이자율이 20% 넘어 집을 사려고 융자를 받는건 비현실적이었고 돈을 모으거나 주위에서 빌리는 밖에 없었다. 우리는 기댈 데도 없었고 남에게 벌리는 성격도 되었기 때문에 둘이 벌어 최소한으로 먹고 살고 양가 부모님 생활을 도와 드리고 남는 돈을 모으면 몇년 후에나 집을 있을까 계산을 봤더니 50년이 걸릴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다니던 노스웨스트 항공사 예약부의 대우는 좋았지만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참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불규칙 하게 뛰고 쓰러질 같은 증세가 자주 일어났다. 염방자 사모님의 소개로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봤는데 결론을 얻지 못했다.

 

직장을 그만 두면 그만한 직장을 구하는게 쉽지 않을 같았다.환경을 바꾸면 나아질까 하는 막연한 희망으로 무작정 이민을 가서 부딪쳐 보기로 했다. 독립 200주년을 기념한다고 미국이 들뜬 1976 7 여름 날에 단돈 900불을 들고 중서부 디트로이트에 도착했다. 나는 29, 그는 24 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극히 무모한 결정이었고 워낙 바탕이 없는 탓에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모든걸 신세계에서의 모험으로 생각하고 용감하게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로 포드, GM,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들의 본사와 공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 회사들에게 부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중소 공장들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늦게 왔다고 그곳 사람들이 말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민자 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에 자동차 공장 사람들이 와서 일할 사람들을 데려 갔었는데 지금은 있는 사람들도 보낸다고 했다. 그래도 시간당 5불로 보수가 좋은 공장에 취직 하는걸 지상 최대의 목표로 정했고 한국인의 가게에서 일하는 틈틈이 공장 마다 다니며 입사 원서를 냈다.

 

주일이면 연합 장로교회에 나갔다. 지방에는 한국인들이 수천명은 있었는데 모두들 흩어져 살아 한인 타운이랄게 없었고 교회에나 가야 한국인을 있었다. 한인 교회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하나씩 밖에 없었다.

 

장로교회에 교인은 많았지만 한국에서 신앙 생활을 했던 사람은 드물었고 영어로 학생부를 지도할 사람이 없어서 예배 시간이면 중고등부 학생들 수십명이 교회 밖의 숲에서 삼삼 오오 떼를 지어 몰려 다녔다. 유년부는 한국어로 운영 하는 같았고 아직 대학부와 청년부 연령의 2세는 거의 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학생부를 지도 했었다는 말씀을 듣고 김득렬 목사님이 나에게 학생부를 맡기셨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에서 도착한 나에게 영어권 아이들을 맡기는건 참으로 대담한 결정이었다.

 

모아 놓고 보니 아이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전혀 몰랐다. 나는 미국식으로 자유롭게 가르치고 배우는 분위기를 몰랐다. 일단 한국식 주입 교육 으로 찬송가와 성경을 가르쳤다. 뒤에서 떠드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여기서 공부하기 싫으면 너희 부모님에게 이르지 않겠으니 남들 방해 하지 말고 밖에 나가 놀아라.”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급기야 학생회의 소속감이 형성되어 모두가 방에 남아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는데 밖으로 나가면 단체에서 이탈 되는 소외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이 스타일의 지도 방식에 익숙해 졌고 따르게 됐다. 그렇게 나의 미주 한인교회 영어권 젊은 교인들과의 인연이 시작 됐다.

 

목사님이 뉴욕 라이프 생명보험사에 소개를 주셔서 교육을 몇주 받았는데 운영진이 마지막 날에 교육을 받은걸 치하하며 고객에게 보험을 팔면 첫해의 보험 불입금은 사람이 갖게 된다고 했다. 모두들 흥분해 서로 축하 하는데 나는 조용히 걸어 나왔다.

 

생명보험사를 포기했다고 목사님께 말씀 드리며 첫해 불입금을 갖는다는데 그거 약한 사람 치는 도둑놈 아니예요?”라고 했더니 목사님은 보험에 들고 싶어도 영어를 몰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은데 그분들을 돕는걸 정직치 못한 일이라고 못하겠다니하며 아쉬워 하셨다.

 

얼마 전에 아틀란타에서 보험 업에 성공한 교우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나도 그때 보험업계에 뛰어 들었으면 성공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는 나를 위한 다른 계획이 있으셨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