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어느 누구가 의로운 분이었었다는 귀절을 볼 때 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의 첫 기억은 6.25 전쟁이 시작 되고 몇일 지나서 였다. 인민군 네 명이 집 마당에 들어와 사방에서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며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쏘겠다고 위협했다. 어머니는 “너희들에게 말 해 줄 수 없다. 쏘거라.” 라고 늠름하게 말했다. 나는 세 살의 어린 나이에도 이런 상식 밖의 대답에 깜짝 놀랬고 엄마가 왜 모른다고 하지 않고 말 할 수 없다고 하나, 정말 쏘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 했었다. 그러나 30을 갖 넘은 젊은 엄마의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는 군인들이 나보다 더 놀랬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며 몇마디 수근 거리더니 슬그머니 총을 내리고 나갔다. 어머니는 강자 앞에서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인자 하고 옆구리에 인민군의 총을 맞을 지언정 거짓말을 못하는 의로운 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중1 이었던 1958년에 봉원동으로 이사간 후부터 우리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시던 1982년 까지 봉원교회 교인이었다. 봉원교회는 1972년에 어머니를 권사로 선출했다.
미국에 오셔서는 우리 삼남매의 아이들을 다 키워 주시고는 두 분이 아파트에서 사셨는데 90이 가까운 아버지가 치매로 어머니에게 난폭해 지셨다는 걸 우리가 알게 되었다. 두 분이 같이 계시게 하는 건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판단해 아버지를 양로원에 모시기로 했다. 그후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던 어머니가 어느날 우편물을 갖으러 집 밖으로 나가셨다가 넘어져 엉치뼈를 부러뜨리셨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단기 요양을 하시다가 퇴원 후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당신도 양로원에 들어가겠다고 자꾸 조르신다. 며느리가 어린 소녀일 때부터 교회에서 알고 지내 남과 같지 않은 사이이고 미국에 오셔서는 우리와 같이 사신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왜 자꾸 나가겠다고 하시나? 당신에게 다정치 못했어도 남편이 혼자 양로원에 있는게 맘 편치 않으셨던가?
다른 노인들은 양로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결국은 들어가서도 자식들이 찾아 가면 차에 먼저 올라타고 집에 가겠다고 성화를 한다는데 어머니는 당신 발로 걸어 들어가셨다. 처음에는 꽤 먼 곳에 모셨다가 몇 달 후 우리들에게서 가까운 곳에 모실 수 있었고 또 몇 달 후 아버지를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 모실 수 있었는데 일단은 아버지의 반응을 염려해 다른 방에 모셨다가 나중에 아버지를 어머니 방으로 모시고 왔다. 그렇게 두 분이 같이 계시게 하는데 일년이 넘어 걸렸다.
나는 그때 부터 매일 퇴근 길에 부모님께 들렸는데 마침 교회에서의 책임을 벗게 되었기에 교회에 가지 못하는 부모님에게 교회를 가져 가겠다고 결심하고 여동생 네와 양로원에서 주일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예배를 볼 때는 예전의 아버지로 돌아가셨다. 찬송가를 예전과 같이 열심히 부르시고 기도도 예전과 같이 힘있게 하셨다.
2년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에게 찾아가 “이제 집에 돌아 갑시다” 했다. 어머니는 “가긴 어딜 가니? 난 여기가 좋다!” 하며 돌아앉아 펼쳐 놓은 성경을 보셨다. 아니 거기가 좋다니? 예상치 않았던 반응에 한동안 할 말을 잊었다. 양로원이 좋다는 말한 노인은 고금을 막론하고 동서양을 다 해서 어머니 뿐일 듯하다.
양로원에 들어간 분들이 2년을 넘기지 못한다고들 했다. 어떤 이는 어머니가 양로원에 들어 가신 후 통 말을 않는다고 걱정을 했다. 노인성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이의 어머니는 1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10년을 더 사시다가 100세가 거의 다 되어 돌아가셨다. 마지막 날까지 좌절감이나 우울증은 찾아볼 수 없었고 기억력은 우리들 보다 좋으셨다.
나는 십여 년 간 어머니와의 예배를 통해 영적 부유함과 육적 부유함에 대해 확실히 깨닫게 됐다. 우리 중에는 물질로는 부유하지만 영적으론 빈곤한 사람도 있고 물질로도 영적으로도 빈곤한 사람도 있다.
어머니는 물질적으로는 극히 빈곤하셨다. 갖은 재산이라고는 양로원 방 작은 설합장에 들어있는 몇 가지 물건과 옷장의 검소한 옷 몇 벌 뿐이었다. 그러나 자진해 겪으시는 어려움을 즐거이 맞으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어머니는 영적으론 우리 누구보다도 부유한 분이셨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물질의 부는 아무리 많아도 가져갈 수 없겠으나 어머니의 막대한 영적 부는 나중에 가실 세상에 어머니 보다 먼저 가 있었을 것이다.
나의 지금의 목표는 어머니를 후일에 대할 때 부끄럽지 않아야겠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같은 의인은 못 되어도 내 주위와 이세상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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