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9살 나던 1976년에 미국에 무작정 이민을 왔다. 생후 반년된 애를 어머니께 맡기고 돈이라고는 노스웨스트 항공에서 3년간 일하고 받은 퇴직금의 대부분을 아이 양육비로 어머니께 드리고 남은 $400을 가지고 오다가 동경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며 $100에 카메라를 하나 샀다. 아이가 부모 사진이라도 볼수있기를 바라서였다.
우리가 온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포드, 크라이슬러, GM의 3대 자동차 회사의 본사와 공장들 외에도 크고 작은 부품 공장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자동차 공장이 일은 힘들지만 보수는 좋다는 얘기들을 했다. 초봉이 $10이라는 것이었다. 최저 임금의 4 이상으로 꽤 좋은 것이었다. 나도 자동차 공장에 취직해 팔자를 고쳐보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입사원서를 냈지만 와보라는데는 한군데도 없었다.
우리가 좀 늦었다고들 말했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International Institute라는 새로 이민온 사람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곳이 있었다. 우리 오기 수년전 까지만해도 자동차 공장 사람들이 거기 와서 일할 사람을 뽑아갔다고들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동차 공업이 사양길에 들어서 새로 뽑기는 커녕 일하는 사람들도 휴직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한국사람이 하는 가발가게, 개인집 페인트 칠, 주유소, 공장등에서 닥치는대로 밥벌이를 하는 한편 여기저기 입사원서를 내고 다녔는데 1년이 지나 1977년 가을이 되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와보라는 연락이 왔다. 제일 먼저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다른 도시의 공장으로 내보내는 부품을 점검하는 auditor 가 되기위한 인터뷰를 했다. 가보니 이미 사람을 뽑았는데 온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했다. 다음에는 TWA항공사에가서 인터뷰를 했더니 돌아가 기다리면 연락을 해주마고 했다. 또 대한항공 시카고 지점에서 일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왔다.
델타항공에서도 연락이와서 공항으로가 Steve Hopkins라는 과장을 만났다. 그사람은 얼마후 한국에 여행갈 것이라며 친근하게 대하더니 결국은 그곳에 취직을 하게되었다. 11월 16일부터 나오라는 통지를 받았는데 나는 다니던 공장을 그날로 그만두기가 어려운 형편이라 하루 늦게 11월 17일 출근했다. 그때 여러명이 같이 취직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승진, 근무시간 선택등이 모두 서열순으로 결정되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 늦게 나가 항상 그들에게 밀린다는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델타에서는 보험과 휴가등 혜택 없이 temporary part-time으로 1주 30시간씩 3개월을 일하면서 저녁에 비행기 내부 청소를 했다. 다음 3개월은 temporary full-time으로 1주 40시간을 일하며 역시 저녁에 비행기 화장실 청소를 했다.
각 자리의 트레이와 의자와 벽을 걸레로 닦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일이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공군 장교였던 내가 할만한 일이었을까. 그러나 군대시절 친하게 지내던 상관 한분이 술자리에서 하던 말을 기억했다. 만주 공략에 성공한 일본 장군에게 기자들이 장군이 된 비결과 공략 성공의 비결을 물으니 그는 처음부터 장군이 되려고 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소위때는 이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소위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중위때는 이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중위가, 대위때는 이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대위가… 그러다보니 장군이 되고 만주공략에 성공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세상에서 비행기 청소를 하는 사람들 중에 제일 훌륭한 청소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배운 사람은 덜 배운 사람보다 청소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라도 만족해하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깨끗이 하려는 노력을 했다. “흠 이자리에서 시작해 이렇게 닦기 시작하면 이일을 10년을 넘게한 저 아줌마보다 더 빨리 더 깨끗이 할수 있을꺼야.”
한국에 있을때는 그런대로 영어를 못한다는 소리는 안들었는데 미국인 직원들이 서로 하는 이야기는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한국사람들은 잡담을 하더라도 할일은 하면서 얘길 하는데 미국사람들은 걸레질 하던 손을 놓고 반장이 와서 잡담 그만하고 일하랄 때까지 잡담을 한다. 나는 얘기에 껴들고싶어도 알아듣질 못해 껴들질 못하니 걸레질만 죽으라고 했다.
또 미국사람들은 시키는 일이 아니면 하질 않는데 나는 일할 비행기가 없을 때에는 화장실에 물걸레질을 하는등 할만한 일을 찾아 했다. 그러므로 반년마다하는 평가때마다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혜택을 모두 받는 정식 직원이 됐고 술방에서 술통에 술을 채워넣는 일을 했다. 작은 병 90개가 채워진 알루미눔 통 두개를 도착한 비행기에 갈아넣고 몇개를 팔았는지를 세어 기록하는 일이었다.원래 수학에 자신이 없는 나였지만 미국사람들은 나보다도 산수를 못해 술방의 혜성으로 인정받았다.
취직한지 한 일년쯤되어 비행기 짐을 내리고 싣는 일을 했다. 이건 승진이어서 봉급이 올라갔다. 하루에 4대쯤 비행기에서 짐을 내리고 4대쯤 비행기에 짐을 실었고 일할 비행기가 없을 때는 휴게실에서 놀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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