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이야기 24

우리가 이세상을 하직한 후 어디로 가는가는 어떻게 결정되나

예전 직장에서 매주 한번씩 중국식당에 나와 같이 가던 동료들 중에 나보다 조금 연상인 오웬과 다이앤 부부가 있었다. 두사람은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었고 남을 돕는 일에 언제나 앞장 섰다. 한번은 식사를 끝내고 한참 더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 오웬이 큰소리로 자기네는 무신론자라고 말했다. 남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많아 오웬의 말에 아연한 분위기였다. 나는 반대쪽 끝에 앉아 있다가 말했다. "오웬, 너희 두사람은 성실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네가 죽은 후에 눈을 뜨면 낙원에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할지도 몰라. 앞으로 다시는 너희가 무신론자라고 말하지 말어." 모두가 숙연해지고 내말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웬은 다시는 자기네가 무신론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역시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조앤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신앙 이야기 2021.01.14

응답 받는기도와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내 평생에 응답을 원하는 기도를 수없이 하고 수없이 응답을 받았겠지만 그중 기억에 뚜렸한 것이 셋 있다. 한국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맥박이 불규칙 한걸 느꼈다. 그럴때면 얼굴에 뜨겁게 열이 오르고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이렇다할 답을 못들었다. 그러던 중 미국에 오게 됐는데 하루는 일자리를 찾아 돌아 다니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심장이 후두둑 뛰었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고 얼굴이 뜨거워지고 어지러워져 누운채로 밑으로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심장에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돈도 없고 보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도 죽고 의사도 죽고 그들의 부인들도 죽습니다. 주님이 살려주시면 저같은 의지할데가 없는 사람도 살고 아니면 돈많고 의지할데가 많은..

신앙 이야기 2021.01.13

나와 교회

1950년대: 나는 장로교인이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장충동에 있는 신일 교회에 다녔다. 후에 울릉도에 가신 의사 이일선 목사님이 담임이셨다. 1960년대: 중1 여름방학때 학교에서 가까운 신촌으로 이사가며 봉원동 사거리에 천막을 치고 모이던 신성교회에 다니게됐다. 얼마 안있어 이원태 전도사님이 부임하셨다. 교회는 연대 땅 끝자락에 흙벽돌 교회를 짖고 옮겼다가 봉원사 끝자락에 자리 잡고 이름을 봉원교회로 했다. 이 교회에서 자라며 중고등학생회장, 청년회장, 주일학교 교사, 중고등부 교사, 성가대원등 많은 일에 동참했다. 이원태 목사님을 신앙 멘토로 모시게된건 큰 특권이었다. 이목사님은 은퇴하시고 교인들이 찾아오기 어려운 평창에서 살고계신다. 1976년 미국에 와서는 디트로이트 연합장로교회에서 Youth G..

신앙 이야기 2017.07.31

벤자민 프랭클린의 종교관과 오늘의 한국교회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꼭 읽어야할 자서전이라고 들었는데 전자책을 전화에 넣고는 회사에서 화장실에 갈때마다 읽고있다. 프랭클린은 17남매의 15번째로 태어났고 학교를 2년도 채 못다니고 그만 두게 됐으나 책을 많이 읽음으로 박식해져 어렸을때부터 학자나 정치가나 귀족이 그와 대화하기를 즐겼고 근면과 절제로 남의 인정을 받고 점차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지금 반쯤 읽었다. 그가 종교관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자기는 어렸을때부터 집을 나가 객지생활을 하며 아버지의 보호와 지도에서 멀어져 살아왔는데도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신 Deity의 이끄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했기에 신의 존재를 항상 믿어왔고 성실하고 정의롭게 살면 이세상에서나 저세상에서나 상을 받고 불의하게 살면 벌을 반드시 받는다고 믿어왔다. 교회 출..

신앙 이야기 2012.07.29